봉준호로 봉준호를 다스리는 세상인가

[뉴스케이프 공희준 기자] 설악산 반달곰을 아시나요

광주항쟁 3주년 무렵이던 1983년 5월, 설악산에 반달곰이 나타났다. 사진은 당시 경향신문 지면

경찰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드디어 밝혀냈다고 한다. 용의자는 지난 세기인 20세기부터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계속해온 무기수였단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경찰은 첨단 수사방법인 유전자(DNA) 감식기법을 활용해 자칫 영구 미제사건으로 묻힐 뻔했던 사건의 범인을 마침내 가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경찰이 찾아냈다는 유력 용의자가 이를 주제로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걸작 흥행영화까지 제작될 정도로 전 국민을 공포와 충격, 분노와 슬픔 속에 몰아넣었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판명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공소시효든 뭐든 상관없이 살인범이 법정 최고형인 극형 중의 극형에 처해져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한(恨)과 원통함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왠지 갑작스러운 범인 색출 소식이 왠지 석연찮게 느껴지는 사람이 비단 필자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비이락이라고, 즉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가족과 본인이 각종 불미스러운 비리 의혹에 휩싸인 조국 법무부 장관으로 인해 문재인 정권이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오랫동안 잡히지 않아온 살인사건 범인의 정체가 하필이면 드러난 탓이다.

조국 법무장관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자신의 확고부동한 소신임을 오래전부터 피력해왔다.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핵심적 본질은 검찰의 권력을 경찰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문제는 조국 장관이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공교롭게도 조 장관 밑에서 근무했던 윤규근 총경이 버닝선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부분에 있다. 조국 장관 개인으로서도, 경찰조직 전체로서도 나날이 나빠지는 여론의 흐름을 우호적 방향으로 바꿔놓을 확실하고도 결정적 한 방이 절실히 필요한 터였다.

김영삼(YS)이 단식하던 바로 그날

설악산에서 반달곰이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 서울에서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단식투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손명순 여사와 김현철 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YS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누리집)

남한사회에서는 정권에 불리한 국면이 조성되면 세간의 이목을 단숨에 잡아끌 초대형 사건들이 전통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터졌다. 1987년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가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 상공에서 갑자기 폭파됐다. 사건 직후 테러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출신의 김현희가 시끌벅적하게 한국으로 신속하게 압송되면서 민주정의당 소속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결과적으로 큰 힘을 실어주었다.

박근혜 정권 당시인 2014년에는 침몰한 세월호의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업무용 노트북의 파일이 디지털 포렌식으로 복원된 날에 역시나 하필이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남이 용인에서 검거됐다. 체포된 유 전 회장의 아들이 경찰서로 압송되는 광경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실시간 중계까지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3년에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항의하며 결사의 각오로 단식농성을 한창 펼치는 와중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반달곰이 하필이면 설악산에서 밀렵꾼의 사냥총에 맞아죽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YS의 단식과 설악산 반달곰의 출몰 사건 사이에, 노태우의 승리와 KAL기 폭파 사건 사이에, 세월호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의 문서파일 복구와 유병언 전 회장 장남의 요란한 검거 및 압송 사이에 어떠한 함수관계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명확한 진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필자의 예감으로는 아마도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크다. 이른바 조국 게이트와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 출현 간의 관계도 두고두고 뒷말이 무성할 전망이다.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문재인 정권의 통제 하에 놓인 각종 관영방송 매체들과, 청와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네이버와 다음 같은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전두환이 김현희 띄우듯 일제히 총력을 기울여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살인의 추억」이 다시금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이봉재봉”, 봉준호로 봉준호를 제압한다

문재인 정권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 영화 「기생충」은 조국 임명 파동을 겪으며 도리어 역적이 되고 말았다.

2019년은 봉준호 감독에게도, 충무로 영화계에도 「기생충」으로 기억돼야 정상일 해였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집주인 식구들이 조국 법무장관의 가족을 빼닮았다는 따가운 눈총이 일면서 해당 영화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계기로 「기생충」을 열심히 추켜세우던 친 문재인 정권 성향의 586 세대 진보 꼰대들의 목소리가 급속히 잦아들었다. 영화가 마치 상영금지 처분이라도 받은 성싶은 분위기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 방식의 재림일까? 혹은 봉준호의 영화는 봉준호의 영화로 틀어막아야만 한다는 이봉재봉 전략의 노림수일까? 기생충이 마땅히 받아야 할 각광과 호평이 같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살인의 추억」으로 황급히 역주행할 기세다.

필자는 다른 사건들은 몰라도 조국 법무장관 사태와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 식별 간에는 정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한데 솔직히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이었지, 불신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중 민심은 문재인 정권을 향한 반대에서 불신으로 그 정서의 색깔과 무늬가 근본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공자는 제자인 자공과의 대화에서 “나라는 군사가 없어도 버틸 수 있고, 식량이 없어도 지킬 수 있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이는 지탱될 수가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문재인 정권에게는 군사에 상당하는 여당도 있고, 식량에 조응할 극렬 지지자들도 있다. 허나 평범한 국민들의 신뢰는 이번 조국 파동을 겪으며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경찰의 발표를 힘없고 가난한 대다수 인민대중이 양치기 소년이 고함치는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 대하듯이 심드렁한 반응으로 받아들이는 근원적 연유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해 잡을 수 있다. 반면에 집권세력으로부터 멀리 달아난 민심을 여간해서는 붙잡기 어렵다. 그럼에도 필자는 다른 해묵은 미제사건들의 진범들이 앞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쉬지 않고 잡히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 대신에 관계당국에 이 마지막 당부만은 꼭 전하고 싶다. 범인은 잡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게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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