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민중과 지식인 사이의 가교 역할 자임해

[뉴스케이프 공희준 기자] 카리스마의 모태는 헌신에 있다

김대중은 1987년 겨울에 생애 두 번째로 대권도전에 나섰다가 쓴맛을 보고 만다. 그러나 그가 창당한 평화민주당이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일약 떠오르면서 DJ는 인생 최고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진출처 : 김대중 사이버기념관)장신기(이하 장) : 정치꾼은 단기적 파장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입니다. 정치가는 장기적 영향을 긴 호흡으로 응시하는 인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후자를 지향하며 평생 정치를 해나갔습니다.

탄탄한 정치적 지지기반은 물론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금은 역설적 사고를, 즉 역발상을 해보길 제안합니다. 국민들로부터 오랫동안 믿음과 사랑을 받는 정치를 하려면 대중에 기회주의적으로 영합하지 않는, 유권자들을 무책임하게 추수하지 않는 진중하고 책임감 있는 정치를 오히려 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파퓰리즘(Populism)에 맞서는 반(反) 파퓰리즘을 과감히 실천하는 정치인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공희준(이하 공) : 장신기 박사님의 지적은 지금 같은 정치사회적 토양에서는 “너 보수지?”라는 역공을 즉시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장 : 차별화라는 게 꼭 톡톡 튀는 행동이나 재치 있는 말투로써만 도모되는 건 아닙니다. 남들이 가볍게 굴 때 나 홀로 묵직하게 처신하는 것도 효과적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지 같은 감성적 겉모습이 아닌 깊이 있는 내공에 기초한 철학적 차별화가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차별화인 것입니다.

공 : 조국 사태의 근본 원인도 철학과 가치에 바탕한 차별화가 아니라, 그럴듯한 외양과 포장에 의존하는 차별화 시도에 있지 않았을까요?

장 : 감각에 기대고 감성에 의지하는 차별화는 국민들이 금방 질리기 쉽습니다. 연출된 이미지는 머잖아 종국에는 그 한계와 바닥을 드려내기 마련입니다.

공 : 인기와 지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인기는 물거품‘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아마 그래서 비롯되었을 테고요.

장 : 그렇죠. 인기와 지지는 그 층위가 확연히 다릅니다. 인기는 공적인 헌신 없이도 얻을 수 있지만. 지지는 사회나 나라를 위한 자기희생이 선행되어야 확보할 수가 있습니다.

공 : 그렇다면 헌신이란 무엇일까요?

장 : 저는 공동체의 이익에 이바지하려고 목숨 걸고 나서는 행위를 헌신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공 : 문자 그대로 몸을 바치는 일이네요.

장 : 지금은 그런 헌신이 없습니다. 남들이 겁내는 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인물들이 정말 희귀해졌습니다.

공 : 문제는 목숨 걸고 나설 만한 목표가 없어진 데 있지 않을까요? 누구를 포토라인에 세우네, 마네 하는 게 진짜 목숨 걸고 달려든 소재는 아니니까요. 겨우 포토라인으로 인해 나라가 들썩들썩할 지경이면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현재 얼마나 경박해지고 사소해져 있는지를 단숨에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장 :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를 하던 시대는 사소해지고 경박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목숨 걸고 정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민주화운동이 종종 희화화되는 세태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출현해 절차적 민주화가 이뤄진 후 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민주화운동가들은 사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이름 없는 평범한 시민으로 여전히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단기적 이익과 순간의 인기를 좇으며 살기 원했다면 그 길고 엄혹한 시절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흙수저 정치인 김대중의 고난과 성공

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은 검은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공식적인 선거 벽보를 촬영할 정도로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반면에 대통령에 취임한 DJ는 미국 태생의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래서 환담을 나눈 일에서 보이듯 사회 주요 분야의 문호개방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출처 : 대통령 기록관 누리집)

장 : 지금 사회가 경박하고 사소하다고 해서 엄혹한 시절로 또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확고하게 지켜야 갈 가치와 태도는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공 : 소신이나 자존감이 그런 가치와 태도 아닐까요? 남들 모두 다 “예”라고 다소곳이 말할 수 있을 때 혼자 당장하게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결기와 신념 같은 것들이요.

장 : 통찰력 있는 전문가적 식견과 안목은 내공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구성인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세울만한 뒷배경이 없는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하기 힘든 맨 땅에 헤딩을 두 차례씩이나 해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공 : 영락없는 무작정 상경이었네요.

장 : 예. 김대중 대통령을 민주당 신파의 좌장으로 있던 장면 박사에게 소개시켜준 주인공은 최서면 현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었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장면 박사가 신앙한 가톨릭 교회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실력과 내공이 없는 인물이었다면 최서면 원장이 그를 장면 박사와 감히 연결시켜줬을까요? 최서면 원장은 당시에는 무명의 정치 지망생에 불과하던 김대중이 엄청난 잠재력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전도유망한 청년임을 아주 일찍 꿰뚫어 보았습니다.

제2 공화국의 총리에 취임한 장면 박사는 청년 정치인 김대중의 언변과 품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장면 총리는 아직 원외 인사에 머물러 있던 DJ를 집권여당의 대변인으로 발탁하는 파격 인사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공 : 지금도 배지를 못 달면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인품이 훌륭해도 심한 말로 개털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 : 그럼에도 장면 총리는 원외 인사를 당의 얼굴과 마찬가지 자리인 대변인에 앉히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장 총리가 김 대통령의 실력을 확실히 인정했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필자는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읽으며 언론과 여론이 극히 저평가해온 장면 전 총리에 대해 DJ가 부여해놓은 가치와 의미와 비중을 발견하고 몹시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다. 김대중의 장면 평가는 어쩌면 홍명보 전 축구 국가대표님 감독의 ‘의리 축구’에 비견될 법한 ‘의리 평가’일지도 모른다.

장 : 박정희 소장이 주동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민주당 신파는 정치적으로 궤멸상태에 빠진 양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장면 총리는 정계를 강제로 은퇴해야만 했습니다. 민정 이양이 단행된 1963년 이후에도 민주당, 특히 민주당 신파의 지리멸렬은 계속되었습니다. 장면이라는 확고한 구심점이 사라진 탓이었습니다. 반면에 구파의 부활과 재결집은 신속히 진행됐습니다. 구파의 영수인 윤보선 전 대통령이 여전히 건재한 덕분이었습니다.

김대중, 민심과의 소통에 나서다

집권 반환점을 앞둔 문재인 정부는 장신기 박사가 자신의 2016년도 책에서 우려했던 대로 “진보는 무능하다”는 세간의 통념을 경제를 중심으로 다시금 확인해주고 있다.대화는 박정희 정권 초기의 한국 야당사를 되짚는 것으로 무게중심이 스르르 옮겨갔다.

장 : 장면이라는 거목이 쓰러진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다시금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야당 속의 야당 신세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야당 안에서도 또 비주류인 형편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당의 어엿한 주류였습니다. 비주류였던 김대중이 주류인 김영삼을 꺾고서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한국 정치사의 파란이자 대이변은 따라서 본인 스스로의 노력의 결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김대중은 계보의 뒷받침도 없고, 후견인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해온 처지였습니다.

지금은 진보진영의 본진을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보수세력의 적자를 자임하는 자유한국당에서도 비주류로 분류되는 대권주자가 당의 공식적 대권후보로 선출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사건이 되었다. 당내 민주주의의 견지에서도, 정치적 역동성의 관점에서도 한국의 주요 정당들은 “중단 없는 후진”을 힘차게 거듭해왔다.

장 : 김대중 대통령이 비주류 소장파의 리더로 활약하던 시대는 지금과는 달리 언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도, 사회관계망 서비스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아득한 아날로그 시대였습니다. 돈 없고, 명성 없고, 배경 없는 야당의 신진 정치인이 믿을 무기라곤 오직 자신의 입과 발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선택한 유효한 홍보수단이 국민들과의 직접적 대면접촉이었습니다. 그는 무수한 연설회를 누비고 강연회를 다니며 일반 대중과의 접점을 꾸준하고 착실하게 넓혀갔습니다.

공 : 현재는 정치인들이 나라의 참다운 유권자인 국민들은 만나지 않은 채 사무실에 앉아 허구한 날 SNS만 해대기 일쑤입니다. 정치가 돈 많고, 시간 많은 극소수 상층 기득권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돼버린 한 가지 요인입니다.

장 : 김대중 대통령은 현대적 의미의 싱크탱크의 역할에도 선구자적으로 주목했습니다. 그는 ‘내외문제연구소’라는 싱크탱크를 설립하고선 정책과 공약 개발에 힘을 쏟았습니다.

공 : ‘다방정치’다, ‘요정정치’다 해서 정치인들끼리 요즘 표현으로 친목질에만 열중하던 낭만적(?) 시대에 독자적인 정책연구소의 창설과 운영은 굉장히 혁신적이고 과학적인 행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들이 유력자를 만날 때 DJ는 유권자를 만난 셈이니까요.

장 : 고 박현채 조선대학교 교수,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등이 김대중 대통령이 왕성하게 교류하던 일급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대의 일류 석학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의한 지적인 생산물들을 연설회와 강연회 등의 형식을 빌려 다수의 국민들과 주도적으로 공유해나갔습니다. 그는 지식인과 민중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했습니다.

공 : 최근에는 SNS에서 유명인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호가호위 일삼는 게 대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런 호가호위용 목적인 친분 과시 대신에 맨 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네요. 사실 보험계약을 맺든, 자동차를 판대하든 진짜 영업 잘하는 세일즈맨들은 지연, 학연, 혈연 등에 구애되지 않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마케팅에 나서 충성 고객을 늘려나갑니다.

장 : 그게 바로 능력이고 실력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알려지기 이전인 1960년대에 행했던 연설 자료들은 안타깝게도 많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1970대 이후의 연설과 강연들은 상당수가 다행히 현재까지도 보존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보고대회’라는 명칭 아래 국민들을 상대로 강연과 연설에 임했는데, 이게 수십 분을 넘어 몇 시간짜리 길이의 마라톤 연설과 강연이 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공 : 몇 시간! 콘텐츠가 없으면 도저히 감당 못할 일입니다.

장 : 더 놀라운 건 미리 작성된 원고 없이 해나가는 연설이고 강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장신기 박사의 설명을 들은 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첩이 없으면, 문재인 현 대통령은 A4 용지가 없으면 어디 가서 제대로 자기 이야기를 못한다는 사회 일각의 수군거림이 문득 떠오르면서 갑자기 자괴감이 드는 것이었다.

장 : 그는 사전에 몇 개의 큰 제목만을 써놓은 게 다였습니다. 그 다음은 김 대통령 특유의 긴 즉석연설이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소속된 계파가 있다면 저는 그건 다름 아닌 실력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산가도 아니고, 명문가의 자제도 아니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민이 희망과 믿음을 가진 건 DJ에게는 발군의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력에 헌신과 선명성이 가미되니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무후무할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 : 긴 시간 동안 흥미진진한 얘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장 : 진지하게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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