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듯 파란 하늘에 메마른 백록담마저 아름다운 한라산

[뉴스케이프 강우영 기자]

11월 30일 제주도 서귀포시 한라산 백록담의 모습. (사진=강우영 기자)

[뉴스케이프=강우영 기자] 한라산 백록담은 메말라 있었다. 눈이 쌓이지도 물이 고여있지도 않았다.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백록담은 을씨년스러웠다. 그나마 날이 좋아 백록담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구름 속에 갇혀 있는 한라산의 참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던 차였다. 올해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백록담을 보았으니 운이 좋았다. 자주 올 수 없는 곳이기에 이런 행운은 긴 시간을 들여 걸어온 보람을 느낀다. 설경을 보기 위해 겨울을 택했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 기자가 다녀간 이틀 후 큰 눈이 내려 한라산은 눈꽃의 향연이었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뿐이다. 제주도를 기준으로 동쪽에서 출발하는 성판악 탐방안내소에서 오르거나 동북쪽의 관음사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딱 두 개라서 아쉽긴 하지만 두 개의 길뿐이니 한라산은 덜 훼손될 듯하다.

기자는 성판악을 들머리로 삼아 속밭대피소-사라오름 입구-진달래밭 대피소-백록담 정상-관음사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총 18.3km에 달하는 거리로 대략 9시간이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다. 반나절이라고 해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장시간 걸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코스다.

아침 8시 반 성판악휴게소에서 김밥을 한 줄 먹고 한라산 정상으로 출발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는 총 9.6km. 들머리에서 속밭대피소 4.1km 구간은 경사가 그리 높지 않아 1시간가량 걷는다. 이 구간은 몸을 푼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사라오름 입구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 산행이 시작되는데 3.8km를 내리 올라가야 한다. 이 구간은 2시간에서 2시간 반이 걸린다.

성악판 탐방안내소를 들머리로 속밭 대피소-사라오름 입구-진달래밭 대피소-백록담 정상-관음사를 날머리로 산행로를 잡았다. (사진=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한 시간쯤 오르니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트로트 가요를 들으며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산에 오면 산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주의인데 속세의 음악이 들리니 짜증이 확 일었다. 그 노래가 산에 오르며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의 삶 속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몸은 산에 있되 마음과 정신은 서울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나는 속세의 노래와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냈다. 그러나 ‘트로트’는 나와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는 듯 20여m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왔다. 속밭 대피소에 도착할 때쯤 생각을 고쳐먹고 트로트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국립공원에서 스피커폰을 틀어놓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듣고 싶은 음악은 혼자 조용히 들으면 좀 좋을까.

속밭 대피소에서 가져온 휴대용 의자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전날 올레시장에서 사 온 제주 감귤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진한 과즙이 온몸으로 퍼졌다. 여느 산도 비슷하겠지만 한라산은 특히 산행로에 돌이 많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울퉁불퉁한 화산석 때문에 자칫 발을 접지를 수 있기에 발걸음을 조심해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걷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라산의 신성함이 아마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서는 오를 수 없도록 그렇게 많은 돌이 깔린 듯하다. 

트로트 음악이 완전히 귀에서 사라진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진달래 대피소를 12시에 통과해야 하기에 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진달래 대피소를 12시 이전까지 통과하지 못하면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출입이 통제된다. 

한라산 정상 부근 풍경. (사진=강우영 기자)

사라오름은 해발 1,323m. 1,200m 지점부터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지만 오히려 바람막이를 벗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수고로움은 더 하는 법.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찌른다. 구상나무 숲사이로 강한 햇볕이 얼굴을 태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등산하기엔 완벽한 날씨다. 트로트를 보내고 10여 분을 걷자 한 무리의 산악회 사람들이 앞서 걷고 있었다. 걸쭉한 지역 사투리가 산의 적막을 깬다. 산의 고요함 때문에 사람의 말소리는 더 정확하게 들린다. 

“내가 아까 올라오면서 누구 만난 지 아나?”

“누구?”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아이가.”

“언니야, 그럴 때는 다리를 확 걸어서 자빠트리야지. 안그렇나?”

“이 언니는 임자 있는 남자만 만난다니까.”

다른 시간, 다른 지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예상치 못한 날씨와 산의 변화무쌍함은 삶의 모습을 닮았다. 삶도 산처럼 그렇게 예측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은 산을 닮은 듯하다. 산악회 사람들은 말이 끝나자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퍼진다. 내가 속도를 내 스쳐 지나가니 아주머니 네 분이 웃음소리가 사라지더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못 들은 척 내 갈 길을 간다. 아줌마 산악대원(?)들을 뒤로 하고 속도를 냈다. 

사라오름을 지나 20여 분을 걸으니 진달래 대피소가 나왔다. 1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 정상에 사람이 많을 것 같아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가져온 컵라면과 김밥을 꺼내 먹었다. 이제 1시간 남짓 걸어가면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1시 45분쯤 짧은 점심을 마치고 다시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30여 분을 오르자 제주도 섬의 남쪽이 한눈에 들어왔다. 먼바다는 벌써 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며 백록담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가 돼서 기온 떨어지면 백록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운무에 모습을 감출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속도를 냈다. 언제 날씨가 변할지 모른다. 눈이 내렸다면 멋진 상고대를 볼 수 있었겠지만 남한 최고봉에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등산로 옆으로 쓰러진 고목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눈이 내린 상상 속의 상고대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정상에 다가갈수록 계단의 경사는 심해졌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걸음을 뗄 때마다 한라산과 가까워진다. 백록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맑은 하늘이 그 기대에 불을 지핀다. 

성판악에서 출발한 지 3시간 40분 만에 한라산 정상(1950m)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백록담은 흙색으로 메말랐지만 백록담의 웅장함에 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라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서쪽 풍경. (사진=강우영 기자)

삼세번 오른 끝에 거둔 백록담의 참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흘린 땀의 수고로움도 어느새 잊었다. 해님이 걷어찬 한라산 정상은 그 산꼭대기가 잘려나가 안덕면 사계리 지경 바닷가에 산방산이 되었다는 전설은 실로 거대한 폭발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한라산 정상 풍경에 취한 듯 30여 분이 흐르자 국립공원 관계자가 하산을 재촉했다. 8km 이상을 또 걸어 내려가야 했다. 짧고 긴 여운에 갈증이 폭발한다. 정상에 서서 성산포를 바라본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도 바다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남서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햇볕에 따뜻해진 공기가 충돌하면서 서서히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반까지 정상에 있는 등산객들은 모두 하산을 해야 했다.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풀린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감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천 개 돌을 밟고 다시 속세로 내려가야 했다. 백록담을 등지고 관음사로 길을 잡았다. 몸은 천근만근 다리도 후들거린다. 그래도 또 언제 올지 몰라 아쉬워 하산 중 백록담을 바라본다. 아! 운무에 쌓인 백록담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한라산 정상에서 관음사 방향으로 가는 하산길 모습. 백록담의 북쪽 벽이 보인다. (사진=강우영 기자)

서귀포시 인덕면에 있는 삼방산. (사진=강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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