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은 자주적 망명정부 수립을 위한 국가적 결단

[뉴스케이프 공희준 기자] ‘역사 수정주의’는 패배자들의 정신승리일 뿐

황태연 교수 등의 「친일 종족주의」는 이영훈 교수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를 ‘부왜노’들의 작품이라며 맹렬히 비판한다.「일제 종족주의」는 「반일 종족주의」의 대항마(안티테제) 성격을 띠고 올해, 곧 2019년 가을에 출간된 책이다. 황태연 동국대학교 교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저자들이 공저한 이 책은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이 주도적으로 밀어붙여온 역사 수정주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으려는 음험한 저의를 지닌 역사 수정주의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왜냐? 이른바 ‘역사 전쟁(War of History)’을 도발하는 쪽은 백이면 백, 전쟁의 역사(History of War)에서 패자로 기록된 측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전쟁에서 졌으니, 가상의 역사 전쟁에서라도 이겨보자는 비루한 ‘정신승리’에 역사 전쟁을 무리하게 개전하는 근본적 동기가 자리해 있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명제를 각색해 표현하자면, 역사 전쟁에서 골백번 이겨본들 실제 전쟁에서 한번 이기는 것보다 못한다.

패배한 실제 전쟁의 결과를 역사 전쟁에서의 정신승리를 통해 바꾸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노릇이다. 따라서 진정한 강국은 역사 전쟁에 헛되이 들어갈 시간과 자원과 인력을 실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작업에 착실히 쏟아 붓는 나라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바라봤을 때 일본이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재등장하는 일을 가장 앞장서서 가로막는 부류는 역설적으로 일본 우익일 수가 있다. 일본 우익은 너무나 소중한 자국의 시간과 자원과 인력을 역사 전쟁에서의 정신승리를 위해 아낌없이 쓰자고 우겨대는 자들인 연유에서이다.

지금은 조종사가 탑승할 필요가 없는 무인기가 머잖아 공중전의 주역으로 떠오를 시대이다. 몇몇 국가들에서는 인공지능(AI)으로 움직이는 전차를 실용화 단계 직전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충군애국’의 정신력만을 막무가내로 강조하며, 발목에 각반 찬 과거 일본제국 군복을 착용하고서 야스쿠니 신사 앞을 요란하게 행진하는 열도의 우익 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육안을 이용한 관측이 훨씬 더 정확하다며 레이더 장비의 전선 배치를 한사코 지연시켰던 일본 연합함대의 고루하고 시대착오적인 지휘관들만큼이나 결론적으로 우리민족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로운 존재는 아닌 셈이다.

고종, 람보는 아니었으나 졸보도 아니었다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직후 한국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남대문 전투의 광경을 그린 한 프랑스 언론의 삽화. 일부 한국군이 청나라 군대 복장 분위기로 왜곡돼 그려져 있다.문제의 핵심은 늘 그렇듯 우리 내부에 있다. 소위 자학사관으로 말미암아 자승자박의 처지에 놓인 건 어쩌면 일본이 아닌 한국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일제 종족주의」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내용은 김종욱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가 집필한 「고종의 항일투쟁사 그리고 수난사」라는 부분이다. 

김종욱 교수는 고종이 일제가 국왕에 대한 인물평으로 묘사해놓은 어리석고 겁 많은 ‘암약(暗弱) 군주’가 결코 아니었다고 선언한다. 김 교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아관파천으로 더 잘 알려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행이 일신의 안전만을 염두에 둔 비겁한 개인적 도피 행각이 아니라, 국제법상의 러시아제국 영토 안에 독립된 조선의 자주적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통치권자 차원의 과감한 결단이자 용의주도한 기획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대한제국은 3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한 나라였다. 이는 동시대의 아시아에서 청나라와 일본에 뒤이은 세 번째 규모의 병력이었다. 김종욱 교수는 고종 황제가 구한말의 의병장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갑오농민전쟁 당시의 농민혁명군 지도부에게 수시로 밀지를 보내 일본과의 국민전쟁, 즉 ‘국가 대 국가’의 정식전쟁을 벌일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고종은 1894년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침탈당했을 무렵부터 1919년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게 잔인하게 독살당하던 시점까지 일본과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었다고 말한다. 고종이 남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유순하고 무기력한 허수아비 군주였다면 일본이 그의 목숨을 노린 암살공작을 쉬지 않고 집요하게 추진했겠느냐고 김종욱 교수는 반문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고종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를 요구하는 수준으로는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를 위시한 「일제 종족주의」의 필자들이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을 정조준해 발사한 역사 수정주의라는 직격탄이 자칫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우려와 불안감 탓이었으리라.

그럼에도 필자는 고종의 대한제국이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문서 몇 장에 일본으로 국권이 통째로 넘어갔다는 기존의 오래된 세간의 속설과 통념을 전복시키려는 김종욱 교수의 진취적인 노력과 시도에 백 프로의 공감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한민족은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통쾌하게 물리친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다. 아무리 근대화의 물결에 뒤지고,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다고 한들 칼 찬 일본 헌병 몇이서 궁궐을 휘젓는다고 하여 눈 뜨고 코 베일 민족은 절대 아니었다.

김종욱 교수가 제기한 ‘고종 복권론’을 일각에서 ‘국뽕’이라고 폄하하고 나설 개연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국뽕이라고 손가락질당할 게 두렵다고 대한제국의 최고통치자가 자신이 직면한 최악의 국내외적 조건에서 취해야만 했을 불가피한 전략적 방책들을, 이를테면 러시아 공사관을 근거지로 삼아 임시망명정부를 긴급히 조직해야만 했던 비상한 결정을 후세인들이 기를 쓰고서 고집스럽게 깎아내릴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는 고종이 혼자 기관총 들고 전국 1개 사단을 너끈히 쓸어버릴 수 있는 람보가 아니었다고 해서 그를 졸보로 성급하고 부당하게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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