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은 나의 힘 : 파비우스 (13)

[뉴스케이프 공희준 기자]

파비우스는 로마인들의 패배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모든 감성적 요소들에 궁예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철퇴를 내리침으로써 국난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이미지는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한니발이 로마 공략에 지체 없이 착수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로마인들은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순순히 백기를 들었을까?

필자가 한니발이었다면 과거에 로마를 침략했다가 되레 큰 봉변을 당한 갈리아 부족의 브렌누스 왕의 경우를 생각했으리라. 더군다나 로마에는 제2의 카밀루스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파비우스가 여전히 건재해 있었다. 한니발이 로마를 즉각 공격할 이유만큼이나 공격하지 않을 까닭 역시 차고도 넘치는 상황이었다.

한니발의 판단은 적중하는 듯했다. 이제껏 그는 이탈리아 반도를 화적떼처럼 들쑤시고 다녀야만 했다. 단 한 개의 도시와 항구도 그의 편을 선뜻 들지 않아온 탓이었다. 칸나에 전투는 이탈리아 안의 역학관계와 세력판도를 일거에 뒤바꿔놓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지방들이 카르타고 진영에 가담했던 것이다. 줄을 바꿔 선 지역들의 행렬에는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인 카푸아도 살며시 끼어 있었다. 카푸아가 카르타고로 말을 바꿔 탔다면, 로마인들은 파비우스로 말을 바꿔 탔다. 파비우스의 분별력 가득한 경고가 백 프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위기 때 강한 인간이 진짜로 강한 인간이다. 파비우스는 로마인들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건 희망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의 부드럽고 신중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강력하고 단호한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책 없이 슬픔에 빠진 광경을 용납하지 않았다. 불안에 편승해 불만을 드러내는 자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사상 두 번째로 수도가 적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할 위기에 직면한 로마가 난국을 수습할 해법이 뭔지는 이미 오래전에 카밀루스가 제시한 바 있었다. 그는 카밀루스의 예를 따라 원로원을 즉각 소집했다. 관리들에게는 직무에 더욱 충실히 매진할 것을 지시했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고 했다. 파비우스는 길라잡이용 노마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패전으로 뒤숭숭해진 로마에 지혜와 인내에 더해서 활력과 용기까지 갖고 왔다.

외부의 적과 싸워 이기려면 먼저 내부의 공포심과 싸워 이겨야 한다. 파비우스는 주민들이 개별적으로 도시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슬픔의 감정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도록 전사자에 대한 추모의 기간을 30일로 제한하였다. 그것도 오직 집안에서만 일체의 추모 행사를 치르게끔 했다.

민심을 안정시키는 작업에서는 종교행사도 열외가 되지 못했다. 케레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의 규모를 대폭 축소해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했고,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부정을 저지른 여사제 두 명을 하나는 생매장하는 방식으로, 하나는 자살을 종용하는 식으로 엄벌에 처했다. 강경책에 더불어 회유책도 썼다. 패전의 멍에를 쓰고 살아 돌아온 집정관 테렌티우스를 성문까지 마중 나가 열렬히 환영한 것이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분위기였다.

파비우스라고 바르로가 왜 밉고 괘씸하지 않았겠는가? 허나 지금은 칸나에에서 엄청난 숫자의 인명 손실을 당한 직후였다. 사람 하나가 아쉬운 때였으니, 그로서는 싸움에 진 과오를 문책당할까 봐 두려워 여기저기 숨어 있을 도망병들과 패잔병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파비우스가 자애롭고 인정 많은 성격인 까닭에 “사람이 먼저다!”를 외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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